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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 흰 그늘 속, 검은 잠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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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10,663회 작성일 18-05-0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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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 검은 9 / 조유리

 

 


  한 퍼서 언덕 아래로 뿌리면 그대로 몸이 되고

피가 같구나

 

  목단 아래로 검은 흙더미 배달되었다

  누군가는 나르고 누군가는 삽등으로 다지고

 

  눈발들이 부비며 사람의 걸음걸이로 몰려온다

  다시 겨울이군, 살았던

  아무것도 뜯겨나갈 없는 파지破紙처럼

  나를 집필하던 페이지마다 새하얗게 세어

 

  먼 타지에 땔감으로 묶여 있는 나무처럼 뱃속이 차구나

  타인들 문장 속에 사는 생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내 뺨을 오해하고 후려쳤던 날들이

 

  흑빛으로 얼어붙는구나

  어디쯤인가,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감정으로 꽃들이 만발한데

 

  죽어서도 되지 못한 눈바람이 검붉게 몰아치는데






 



  
 
  희가 죽었다
  죽은 희가 부르는 노래에
  삼켜진 내 목소리를 만지며, 사십구 년째
  오늘은 희가 태어난 날
 
  춥고 아픈 배를 갈라 희를 죽이고 다시 희를 낳은 날
 
  세상의 모든 희가
  오늘 태어나고 어제 죽었다
  흰 삼베를 걸친 희가
  검은 배냇저고리를 갈아입은 희가
 
  전신거울을 들여다보면 하반신 아래 헝클어진 뼈들로 희가 서 있다
  다시 들여다보면 달에서 처방받은 약병들로 쟁여진 희가
 
 생의 반나절을 이쪽과 저쪽에 세워 두고
 
  왼쪽 젖가슴을 도려내야 한다니 양 가슴 다 들어내 주세요,

검은 그을음 속에서 얼굴을 뒤지고 있는 태반까지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희는 털모자를 짰고
  나는 유일한 긴 생머리를 간직한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를 살다 떠난 모든 희가
  헛몸이 되어
  되살아나고 있다

 

 

 

누란 가는 길

 

 

 

 

이 길을 감고 푸는 동안
내 몸에는 실오라기 한 올 남지 않았네
바늘귀에 바람의 갈기를 꿰어
길게 박음질한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는 저녁
몸 바깥으로 향한 솔기부터
올을 풀기 시작하네
 
바람이 모래구릉을 만들어 낙타풀을 키우는 땅
결리고 아픈 생의 안감을 뒤집어보면
천년 전 행성이 반짝 켜졌다 사라지곤 하네
계절풍은 고름을 풀어 우기를 불러오고
 
초승달을 쪼개 먹다 목에 걸려 운 밤
캄캄한 잠실蠶室에 엎드려
산통을 열어 한 사내를 풀어 주었네
수천 겹 올이 몸에서 풀려나갈 때
살아온 시간 다 바쳤어도
바람을 동여매지 못하리란 걸 알았네
 
내 몸속엔 이 지상에 없는
성채가 지어졌다 허물어지고
폐허가 된 태실胎室 속
 
목숨을 걸고 돌아갈 지평선 한 필지 숨겨두었네
   
 
   

 



 
회화나무 종루에서 흰 발바닥이 흘러 내릴 때
 
  
 
저만큼인가, 흰 나비와
나와의 거리

삼베보자기를 풀면
저쪽 세상이 한 보따리 펼쳐진다

상여를 메고 꽃놀이 가신 큰아버지
암병동에서 성냥불을 쬐던 외사촌
까맣게 탄 망막 저편에
태를 놓아버린 첫아이

어느 먼 생이

쇠종에 수의를 입혀 저녁의 무덤가로 끌고 가는 걸까
무수한 밤을 살아온
한 편의 이야기도 아직 시작하지 못했는데

태어나 첫울음이 한 약속을 믿었지만

눈물이 마르는 동안
얼굴은
 
식은 찻물로 돌아가고
누가 묽은 나날을 마흔 번 넘게 우려 건져내 버리는가
 
웃고 울다 쓸쓸해져 올려다보면
허공을 흘러 다니는 나비의
흰 발바닥들


 

 




천문泉門
    

 


 
아기를 낳다 죽은 여자가 발굴되었다
산도를 빠져나가지 못한 태아의 머리가
문지방에 걸린 자세로
물구나무서 있다


덜 여문 시간에 당도한 문턱
삐그덕 열린 틈으로
 
젖꼭지를 물리기 위해
잰걸음질하였을 텐데
숨이 닳도록
애 끓였을 텐데

간질거리는 잇몸에 적두죽을 발라주며
행여 엎질러질 새라
 
숨골까지 걸어 잠근 채
죽은 힘으로 새끼를 꽉 껴안고 있는
저 문설주

필사적으로 지극하시다
 

   
   


 
사바사나Shavasana*
 
  
 
죽음을
개었다 펼 수 있나
깔았다 다시 개어 윗목에 쌓아두고

목숨을 되새김질해 보는 체위
숨골이 열리고 닫히는 허구렁에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나로부터 나 조금 한가해지네

감은 눈꺼풀을 디디며
천장이 없는 사다리가 공중을 빗어 올리고
 
목덜미로 받아 낸 악장의 형식으로
죽음을 게송해도 되는 건가
백 개의 현을 건너 걸어 나간
먼 저녁이 되어
 
이 세상 계절 다 물리고 나면
어느 사지에 맺혀 돌아오나
누구의 숨 떠돌다
바라나시 강가에 뛰어드는 바람이 되나

뜬 듯 감은 듯 어룽어룽 펄럭이는
눈꺼풀이 산투르가락을 연주하는 동안

어제 아침 갠 이부자리가 내 숨자락을 깔고
기웃기웃 순환하는 동안



*사바사나(shavasana) : 송장자세라고 부르는 요가의 이완 자세로 죽음과도 같은 깊은 고요를 체험함
 
  
 
 
  
 
유리房
 ― 故 장자연을 추모하며
 
 


이 밀실이 맘에 들어
나뿐이지만
밖에서 내가 들여다보이는 다정함과
독감이 유행이어도 말수를 줄이지 않아도 돼
혼잣말은 무덤 속에서
일백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는 문장이지
 
즐기는 것이네, 나를
참배하는 유서처럼
테라스에 양귀비를 심어놓고
누군가 흘리고 간 탁상달력에 박힌
아라비아 숫자를 아껴가며 까먹네
 
들여다보는 것이네
너머
거처했던, 반짝이던, 우글거리던
 
꽃보다
나 귀했지 이백서른 장이나
편지를 써 두고 왔는데

 

수취인들은
내 필체 대신, 앵속
산발한 꽃잎들을 필사해 허공에 뿌려대네
 
감정하고, 조작하고, 유린하는 동안
나뿐인
이 밀실이 영영 맘에 들어

 

 

 


 
내연內燃
 
  
 


손톱 끝이 부러졌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고
나는 아프지 않다는 말에 튕겨져 나갔다
 
폭설 끝에 도굴당한 뒷문들이 생겨났다
아는 이름들이 무리 지어 드나들었다
누구에게도 저녁을 먹자고 팔짱을 걸 수 없을 때
한곳을 응시하면서 여러 개로 분열되는 얼굴들
구석으로 밀어 쌓아놓은 눈더미 속을 뚫고
박쥐란이 피고 있었다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들이 흘러내렸다
바라만 보는데도 마주 앉은 사람의 윤곽이 지워졌다
우리라는 말을 펼쳐놓으면
짓무른 무늬들이 봄을 다투어 빠져나갔고
개 짖는 소리가 깨운 잠에선
기분을 알 수 없는 턱관절이 덜컹거렸다
 
눈 녹은 물로 골짜기를 내다 진창이 된 속을 후벼 보면
구불구불한 붉은 내장이 있고
한 뼘씩 벌어질 때마다 구설들이
유월이 쏟아놓은 폭설처럼 잠깐 눈부셨으나

깨진 손톱 모서리로 문질러 봐도 아무도 상하지 않았다
 
 
   
 


복상사
 
  
 
   오르는 것만으로도 한 오백 년 걸렸는지 몰라, 환장하게 숨이 차는 거라 연장은

가파르고 나의 노동은 꽃살문짝 젖히려다 꽃날을 삼킨 거라 생사가 용접된 순간을

 수습하기 위해 모퉁이 드러난 그믐달을 지목하거나 까진 무르팍에 옹송그린 몇

개의 기호들을 염탐해 보지만 접신 쩍 들러붙는 순간 천공을 틀어막은 벼랑을 천기

누설죄에 봉할 것인가 왼손과 오른손, 갈빗살과 갈빗대를 끊어 노를 저은 하룻밤

행적은 수족이어서, 한 몸의 동의어라서


  배꼽 위에 방사된 언어들로 나는 영영 블라우스 단추를 여밀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거라

 
 

 



흰 새가 붉은 지느러미를 갈아입을 무렵
 
  


 
  비려, 그런 저녁은
  요일마다 색깔이 다른 월력을
  생피로 괴어놓고
 
  저녁마다 제 뼈를 오므린 바람이 여자의 내륙을 샅샅이 돌아다녔다는데
 
  내 여자만 아는 사생활이 한 번도 입지 않은 속옷을 개키며 홍해를 건넜지
대엿새쯤 꼬박 붉은 지느러미 돋는 동안 가랑이 사이 일들이 종교가 되고 혁명이
되고 사랑이 되고
 
  지평 끝에 널어 둔 계절이 마르면서 얼면서 서랍을 열었다 닫으면서 내 여자의 살도
낡은 비유가 되어 갔지만
 
   들끓는 체위의 맨 처음
   피 묻은 고독을 배란하는 저 여자
 
  내 여자만 아는 늙은 엄마의 일몰 무렵이지, 여긴
  

 



 ============

조유리 시인 약력

 

서울에서 출생

2008년 《문학·선》으로 등단

시집 『흰그늘 속 검은 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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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서피랑님의 댓글

profile_image 서피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조유리시인님,
보내주신 시집 잘 받았습니다...

달리 답례할 길이 없었는데
여기서라도 인사드리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간 틈틈히 읽어 보니,
찬물에서 갓 건져 낸 국수 면발처럼
눈빛이 살아있는 시들이 많네요.. 
작위적인 느낌보다 마치 서술과 한 몸이 된 듯,
단단함이 느껴지는 시집이었습니다.

시집 발간을 축하드리고,..
늘 좋은 날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통영에서 이명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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