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덕 / 놀란흙 외 9편 > 이달의 시인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이달의 시인

  • HOME
  • 문학가 산책
  • 이달의 시인
    (관리자 전용)
☞ 舊. 이달의 시인
 
☆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중견시인의 대표작품(自選詩)을 소개하는 공간입니다

마경덕 / 놀란흙 외 9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4,556회 작성일 19-01-05 22:08

본문

2019년 1월의 초대시인으로 마경덕 시인을 모십니다

마경덕 시인은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신발』『글러브 중독자』『사물의 입』등이 있습니다.



 

 ========================

 

놀란흙 외 9

 

  마경덕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클립

 

 

​  마경덕


나무들이 파릇파릇 봄을 끼운다

가지마다

단단한 집게클립으로


강을 건너는 누의 클립은 악어의 아가리

종유석과 석순도 석회동굴이 클립이다

봄바람과 스카프가

맞물린다 정오와 식곤증과 커피가, 마트와 카트와 카드가

맥주와 치킨과 퇴근이

빌딩은 빌딩끼리, 골목은 골목을 물고 버틴다

몸에서 멀리 뻗어나간 각각의 발가락도 하나로 꽂혀있다

하늘이 새 떼를 감싸는 것도

헤어롤이 머리를 휘감는 것도 클립의 방식

옛 애인과 과거를 정리하지 못한

어지러운 연애들

클립에 끼우지 못한 결혼은 쉽게 깨진다

 

 

      

      

 

 

 

 

객짓밥

  마경덕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소금쟁이를 먹이려고

죽은 곤충을 연못에 던져주고

물위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쩍 벌어진 다리를

네 개나 달아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섰다

 

 

       

 

 

 

 

 

딱풀


   마경덕

 

 

나사를 죄는 방향과

나사를 푸는 방향이 있다

오른쪽과 왼쪽은 노동, 또는 휴식


초록 옷에 노란 모자를 쓴 아모스*

한 바퀴 돌아 어딘가에 제 몸을 뭉개고 집으로 드는 날

, 반으로 키가 줄었다

문방구에 매달린 물체주머니

조개껍데기 나무토막 유리구슬 자석 조약돌 플라스틱조각들

물체의 대표들은 주머니로 들어가고

애매한 이것을 주머니는 밀어냈다

성분은 종을 만들고

혈족은 혈족끼리 어울리지만,

짧은 스틱에 갇힌 흰 살점은

이 다른

종이와 근친이다

백지만 보면 지분거리는 버릇은

누가 봐도

, 풀이다

   *상품명

 

 

 

 

 

 

 

 

책들의 귀


   마경덕


책의 귀는 삼각형,

귀퉁이가 접히는 순간 책의 귀가 태어나네

주차표시 같은 도그지어*

졸음이 책속으로 뛰어들면 귀가 축 처지는 책

킁킁거리며 손가락을 따라가던 책은 그만 행간에 주저앉네

순순히 귀를 내주고

충견처럼 그 페이지를 지켰지만 해가 가도

끊어진 독서는 이어지지 않고 책의 심장에 먼지만 끼었네


귀 접힌 자리마다 쫑 메리 해피 도꾸 누렁이

쥐약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눈빛이 생각나 눈에 든 문장에 밑줄을 긋네

쫑긋, 귀를 추켜들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고 가랑이에 바르르 눈치를 밀어 넣던 비굴한 이름들

흘러내린 두 귀를 실로 묶다가 본드를 발라본 적 있네

셰퍼드처럼 진돗개처럼 자존심을 세우지 못한

아비도 모르는 개들은

마루 밑 신발짝이나 물어뜯다가 복날에 하나 둘 사라졌네

순한 책의 귀,

녀석도 잡견이네 침을 묻혀도 짖지 않고 책장을 찢어도 물지 않네 누군가의 손짓을 따라가 집을 잃은 책들은

귀를 펴고 또 다른 주인을 섬기거나, 귀를 접고 헤어진 주인을 그리워하거나

  *도그지어(dog's ear) : 책장을 접어놓은 부분이 강아지 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층층 또는 겹겹

 

  마경덕

 

 

폭력의 지층을 보여주는 저 투명한 수조

다리와 몸통이 뒤섞인 무질서는 먼 바다를 수입한 피의 연대기

짓밟고 올라타고 깔리고, 아우성이 선명한 저 상술商術

모두 물속에 기록되었다

 

빽빽한 틈으로 혓바닥과 눈알을 집어넣는 사람들


저 가느다란 산소호스는 혹독한 고문의 도구

치솟는 물방울로 숨구멍을 터주며 서서히 죽이는 방식으로

주말은 부활한다

 

절반쯤 죽어

싱싱하게 꿈틀거리며

극한 통증을 넘어 내게로 오는 것들

러시아킹크랩, 랍스터

딱딱한 몸집에 탈피의 고통이 몇 번이나 다녀갔나 태연한 저울은

쉬지 않고 그들의 죽음을 계산하지만 절망의 값은 0이다

 

쉭쉭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길가에 늘어선 대게집 찜통들

30분마다 붉은 꽃을 활짝 피우며

쌓아놓은 물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가족나들이에 들끓는 주말을 맛보려고 들고나는 접시가 층층이다

 

불안한 호흡이 신의 결재를 기다린다

 

 

 

    

 

 

 

 

식빵의 체온


   마경덕

 

 

방금 오븐을 빠져나온 식빵들

뜨거운 체온을 식히고 있다

훈훈한 기운이 빠져나가는 그 사이

참새 한 마리 포르르 저쪽 가로수에 날아가 앉았다

빵집 앞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우르르 길이 열린다

구수한 냄새가 날아가는 동안,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침대 위에 툭 떨어뜨린 손을 주워

뺨에 비비던 그때

어머니는 잠깐 살아있었다

맥박이 지워지고 식어버린 손은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빵이 식어가는 그 정도의 시간에,

 

따뜻한 온도가 오늘의 빵이다

말랑말랑한 오늘을 사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

비닐봉지는 입을 벌리고 성급한 포장지에 김이 서린다

딱딱한 어제는 세일로 묶여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식빵들, 마지막 손인 듯 빵을 붙잡는다

따스하다

아직 빵은 살아있다

 

 

 

 

 

슬픔의 협력자들

 

   마경덕

 

 

   만지면 축축하고 어두운 것들은 배후가 있다

 

   참나무 숲은 어둑한 기운을 풀어 저녁이란 옷을 입는다

   해거름이 몰고 온 퍼덕거리는 어린 새 한 마리는 저녁의 마지막 단추가 되고

숲은 닫혔다

 

   그때 내 감성의 치맛자락이 어둠의 틈에 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온전히 슬픔 한 벌을 짓지 못한 탓

 

   솔기가 터진 늦가을 겨드랑이 사이로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

 

   어렴풋한 저편에서 울컥,

   무언지 모를 뭉클한 것들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덩어리들이

 

   검게 그을린 발목이 보이고

   노인의 손에 주저앉은 저녁의 영혼이 말간 콧물에 번져 굴뚝을 통과하고 있었다

 

   슬픔의 주성분은 숲의 뼈가 타는 냄새라고 적었다

 

   목이 잘린 해바라기가 줄지어 서 있는

   외딴집이 보이는 그 언덕에서

 

   가만히 무릎을 웅크리며 누군가에게 꼭 슬픔을 들키고 싶었다

 

 

 

 

아침의 뼈


    마경덕

 

 

귀에 닿기도 전

절반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작은 새 소리가 창틈으로 스민다


간밤이 남아있는 무거운 눈꺼풀로

화장실에 앉아 엿듣는 허공의 은밀한 말이

빨랫줄에서 살구나무로 번지고 있다

간장 종지나

꼬막껍데기 한쪽에 담기 좋은

딱 그만한

한 꼬집의 말

 

파도에 굴러

하얗게 뼈만 남은 조가비에도 반쪽의 소리만 남아있었다

마요네즈 케첩 칠리소스도 뿌리지 않은

맹물 같은

 

이 맑은 소리는

세상의 약속도 버려두고

변기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만 들을 수 있다


이른 아침

잠깐 내게로 와


해 뜨면 사라지는,


허공의 실핏줄 같은 미세한 소리가 아침의 뼈를 맞추고 있다

 

 

 

 

 

 

측백나무 서재

   마경덕    



황금측백나무는 책꽂이 형식

그 앞에 서면 마치 서재 같다는 생각,

제목만 보여주는 가지런한 책들처럼

줄기에 수직으로 꽂힌 납작한 이파리들 모두 측면이다


손을 밀어 넣기 좋은 딱 그만한

틈과 틈, 시집 한 권 몰래 빼낸 자리 같다

천지天地를 짓던 셋째 날

섬세한 잎맥도 그리고 잎새 둘레 톱날무늬도 새기느라

하나님은 돋보기까지 찾아 쓰셨다

돌려나기 뭉쳐나기 어긋나기 마주나기, 잎차례도 정해

조각조각 그늘까지 붙여 태어난 나무들


천 가지 만 가지 달라야하니 얼마나 머리가 아프셨을까


잠시 무릎을 펴고 둘러보니 사방천지

가로가로가로가로가로……

문득 생각을 뒤집고 측백나무를 설득했을 것이다

책 한 권 없는 부자보다 책이 넘치는 가난한 시인을 사랑한다고

황금이란 호를 덤으로 얹어

하나님은 그때 각별한 시 한 편을 측백나무에 꽂아두셨다

그리고 나는 그 시를 필사중이다

===================================== 

 

마경덕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신발』『글러브 중독자』『사물의 입

 

 


추천4

댓글목록

향일화님의 댓글

profile_image 향일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구워낸 식빵처럼
맛있게 요리해주신 언어의 냄새에
기분까지 따스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마경덕 시인님 감사합니다~

노트24님의 댓글

profile_image 노트2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부족하나마

슬픔의 협력자들/마경덕

시와영상방에 ...

중간에 차도 마시면서
다음 날엔
산책도 하면서
시를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시
감사합나다()

머니머니하지만
건강이 최고입니다^^

소야정영숙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소야정영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존경하는 마경덕 교수님
항상 곁에서 시와 함께 생활하시고 진정 시인으로
살고 계시는 모습을 뵈면서 존경하는 마음 날로 더
깊어집니다
사랑합니다. 항상 건강하게 건재 해 주시길 ...
소야, 잠시 인사드리고 갑니다

Total 28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