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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 -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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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595회 작성일 16-03-0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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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 - 장석주

 

 

1950년대 말, 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붉어진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며 잡지, 원고료, 문단 얘기들이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좌중의 화제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 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향해 직설岵� 비판과 함께 욕을 토해낸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쎄, 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 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 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시인 김수영(金洙暎.1926~1968)이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한 김수영.

 

그는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까발려 내보이며, 그때까지 한국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여성적 운율과 재래의 토속성을 벗어던지고 세련된 도시 모더니즘의 시세계로 나아갔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금기와 허위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그가 생전에 남긴 1백80여편의 도저한 요설의 시들은 곧 쉬지 않는 싸움의 도구이고, 싸움의 현장이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수영네 집안은 본디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부상(富商)들로 이루어진 중인들의 주거지인 관철동에 있었다. 무반(武班) 계급에 속한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 철원. 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 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김수영이 태어나던 해에 관철동에서 종로 6가로 이사한다. 그는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치고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가 거기서 한동안 연극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인 "묘정(廟廷)의 노래"는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趙芝薰流)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그가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학했다가 이내 그만둔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선배 시인들의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언어 관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 많던 그는 두번째 작품인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에 이르러 범속한 일상용어들을 시어로 바꿔놓는다. 김수영의 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사물과 현실을 "바로 보려는 정신"이다. 이 비타협적인 "바로 보려는 정신"이야말로 반골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정신인 것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평남 야영 훈련장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北院)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그런데 얼마 뒤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듯이,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美八軍) 수송관의 통역, 선린상고 영어 교사,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당시 한국문단의 미풍 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에게 글쓰기와 번역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버는 노동이다. 그는 작품이 발표되거나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나면 신문사나 잡지사로 찾아가 당당하게 원고료를 재촉한다. 창작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김수영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한 원고의 원고료를 받으러 온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1960년 4월 12일 부산일보를 받아 든 독자들은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 부두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주검 사진이다. 마산상고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북 남원의 집을 떠나 마산의 할머니 집에와 있던 김주열은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진 3월 15일 밤에 사라졌다. 행방불명된 지 거의 한 달만에 참혹한 주검이 되어 나타난 열일곱 살 소년. 이 한 장의 사진이 3.15부정선거와 장기집권을 꾀하는 이승만정권에 신물이 나 있던 민심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어 마침내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4월 혁명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이성적 주체의 자율성, 개체의 주관성과 내면성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고 자신들의 주체적 정체성을 강화하며 글쓰기를 밀고 나간 전에 볼 수 없던 세대다. 4월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한결 강렬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으로는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 소설가 최인훈, 평론가 김현을 꼽을 수 있다. 4월혁명 기간 내내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거의 매일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고, 어느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날이 새면 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4월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난해시에서 참여시로, 서정시에서 혁명시로 나아가던 그는 4.19 전에 내놓은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하며 혁명을 예감한다. 또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시의 뉴프론티어")라고 선언한 바도 있다.

 

김수영은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비로소 그의 시 세계는 만개하며 절정을 맞은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풍자(諷刺)와 해탈(解脫) 사이로 뚫린 길 위를 질주한다. 그의 시는 독재, 빈곤, 무지, 허위, 속물 근성을 사정없이 질타하고 후진국 지식인의 설움을 머금는다.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소시민적 자아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까발리며 그는 치를 떤다. 이처럼 젊은 정신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언어는 그를 영원한 청년시인으로남게 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 사랑과 평화, 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라벌예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시간강사 노릇을 하던 그는 이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뒤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요직을 친일 지주와 관료, 경찰 출신이나 보수적 인사들이 차지할 때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광화국!/너는 나의 적이다/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토로하거나, 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군사쿠테타가 터지고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 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스스로 혁명의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 인식이다.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 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 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 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

 

그는 혁명 뒤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국의 후진적인 정치 현실에 절망하며 그 절망을 술로 풀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 가지고 경찰서에 데려다 준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업혀간 그는 순경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더럭 겁을 내기도 한다.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잦은 음주와 가정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일부) 이 시는 주체로서의 각성과 반성을 보여주는 김수영의 정신적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의 실천적 이성은 마땅히 "왕궁의 음탕"과 "언론의 자유","월남 파병"같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에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한다.

 

설렁탕집 여주인과 야경꾼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소시민의 범주에 든다. 행동에 나서기보다 일상의 조가비 속에서 방관자로 지내며 나약한 후진국 지식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가 치를 떤 까닭은 바로 이런 비겁함 자체가 퇴폐고 타락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그를 자기 연민과 비애의 감정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때때로 온갖 억압으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의 고독한 자기 학대로 나아가게 한다. 영원한 자유를 향한 비상과 거듭된 좌절 사이에 걸쳐 있는 김수영의 시 세계는"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의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1968년 4월 13일, 그는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 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청중을 당혹에 빠뜨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 - 바로 지금 이 순간에 -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한다. 1968년 6월 15일, 그는 이날도 아내가 번호를 매긴 원고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있던 신구문화사에 나갔다.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은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辛東門), 늦깎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李炳州), 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鄭達泳)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우돌하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야,이병주, 이 딜레탕트야"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병주는 "김 선생,취하셨구먼"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 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린다. 그 때 좌석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갈색 옷을 입고 있던 김수영은 "퍽!"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나가떨어진다. 밤 11시 30분께의 일이었다. 그는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진다.

 

김수영은 스스로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의식을 시 속에구현하고자 애썼다. 그는 해방 이듬해에 시작 활동에 뛰어들어 1950년대의 궁핍하고 혼란한 시기에"후반기" 동인을 거치며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인 문법을 발견하고 비판적 시선을 날카롭게 심화시켰다. 이어 자유에 대한 갈망의 구체적이고 극적인 표현인 4월혁명을 기점으로 1960년대에 들어서며 아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 땅의 현실과 그의 의식은 첨예하게 부딪친다. 이때 시인 김수영의 비판적 감수성이 절정의 시편들을 토해낸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내놓은 것으로 새로운 변모를 예감케 하는 "풀"을 쓰기까지 시적인 탐색 작업은 한결같이 이어진다. 1969년 사후 1주기에 맞춰 그의 무덤에는 시비(詩碑)가 세워지는데, 이 시비에는"풀"이 육필(肉筆)로 새겨진다.

 

김수영은 죽은 뒤에 더 높이 평가를 받고 유명해진 시인이다. 그가 죽은 뒤 민음사에서는 1974년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 1975년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1976년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1979년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을 잇달아 펴낸다. 이후에도 지식산업사, 창작과비평사, 열음사, 미래사 같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시선집을 내놓았다. 김수영은 근대적 자아 찾기, 온몸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이상(李箱) 이후 최고의 전위시인이며 4월혁명의 정치적 함의를 정확하게 읽어낸 명실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그는 문학 속에 하찮은 "일상성"을 수용하고, 삶이 문학이며 문학이 곧 삶임을 일깨운다.

 

거칠고 힘찬 남성적 어조의 시 속에 담아 낸 소시민적 자아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 폭로, 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 빈정거림, 맹렬한 비판은 오랫동안 여성적 정조의 전통을 이어오던 한국 시에 대한 반동이며 갱신의 뜨거운 몸짓이다. 그는 정신의 깊이와 정직한 자기 성찰, 예술가의 순결한 양심과 완전하게 밀착된 시를 쓰려고 했으며, 이것이 곧 시인에게 부과된 행동과 실천의 길임을 믿은 사람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삼중의 싸움, 곧 언어와 자기 자신, 그리고 정치 현실과의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김수영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그의 시집이 30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가장 널리 그리고 꾸준히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는 "풀"과 "바람"이라는 명사와 "눕다" "일어나다" "울다" "웃다"라는 동사 두 쌍만을 교묘하게 반복함으로써 뛰어난 음악성을 만들어낸다. 단순하기에 오히려 암시성의 극대화를 가져온 시가 바로 "풀"이다. 이런 까닭에 일부에서는 풀을 민초의 상징어로 읽어 참여시의 표본으로 내세우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대지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근본적 삶과 관련된 순수 서정시의 백미로 본다. 이처럼 견해가 엇갈리는 것 자체가, 이 시가 풍부한 의미성을 내재하고 있는 문제작이라는 증거다. 이 시는 직설투의 딱딱한 산문적 언어에 의한 시작 과정을 거쳐 시인 김수영이 도달한 예술적으로 깊어진 세계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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