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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공동체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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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645회 작성일 16-03-1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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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공동체 - 나희덕

 

왜 공동체를 말하는가

 

왜 공동체를 말하는가. 이 질문에 바타이유는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결핍에 대한 인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어 결국 타자를 필요로 하고 공동체를 찾게 한다는 것이죠. 모리스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바타이유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이해마저 사라져버린 시대에 그 요구에 관련된 공동체의 가능성 또는 불가능성이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그런데 블랑쇼가 말하는 공동체는 완전하고 단일한 연합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드러내며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가르쳐 줍니다. 문학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체적 생명에게 죽음이 언도된 것처럼 모든 글쓰기는 말할 수 없음에서 출발하며 지워짐이라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또한 작가는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 쓰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순간 그것의 문을 열고 빠져 나옵니다. 바타이유는 문학의 소통을 둘러싼 그러한 익명성을 “부정의 공동체,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타이유의 이 말은 오랫동안 군림해 온 근대적 주체와 언어의 유용성에 종언을 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세계의 불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희미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목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공통된 이념이나 신념이 없이도 공동체는 가능하며, 오히려 공동체의 전체주의적인 속성을 극복할 때라야 비로소 나와 타자의 새로운 관계가 열린다는 것이죠. 그것은 나와 타자가 동일성의 원리에 기대지 않고 제 3의 영역으로 무한히 열려 있는 소통의 공간을 형성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문학 중에서도 시는 이러한 공동체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장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할 수 없음을 말하려 한다는 점에서, 단일한 해석을 거부하고 다양한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부재를 통해 다른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시의 목표는 더 이상 주체와 세계의 합일을 유려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적인 언어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동안 스스로의 한계에 대면하면서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을 받아 적습니다. 바타이유가 『문학과 악』에서 블레이크의 시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시는 부재라는 이름의 불가능에 눈뜨게 하는 종교”인 셈이지요.

시와 공동체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우리가 시와 공동체를 손에 잡히는 어떤 실체로 상정하고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데서 비롯됩니다. 특정한 이념이나 조직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게 통념이지요. 시 역시 문학 제도나 형식의 영역 안에서만 이해하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시와 공동체는 무관하거나 때로 공존하기 어려운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와 공동체의 특정한 개념이나 역사적 범주를 괄호 안에 넣고 보면, 시를 쓰는 일이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기여하는 일이 될 수 있고, 시 자체가 언어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한국 현대시와 공동체

 

한국 현대시에서 고향 상실이나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주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때는 대체로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공동체적 질서가 심각하게 위협받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기에는 발화의 주체가‘나’라는 단수에서‘우리’라는 복수로 바뀌면서 시대적 상실감이나 결핍을 상상력으로나마 메꾸어 나가려는 시인들의 노력이 두드러집니다. 그렇게 시는 현대사 속에서 전체성의 폭력에 응전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지요.

먼저, 1930년대 식민체제의 수탈로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고 모국어가 훼손되는 상황에 맞서 시를 썼던 이용악, 백석, 정지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용악이 서사적 방식으로 이농민의 현실을 담담하게 증언했다면, 정지용은 고향 상실의 정서를 절제된 감각으로 노래했지요. 백석은 『사슴』이라는 시집을 통해 고향의 토속적인 문화와 언어를 재현함으로써 공동체의 복원을 꿈꾸었습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기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모닥불」

 

이 시에서 모닥불은 공동체적 시공간을 형성하면서 식민지의 슬픈 역사를 환기시킵니다. 모닥불을 타오르게 하는 존재들을 나열한 1연이 ‘사물들의 공동체’라면, 모닥불을 쬐고 있는 존재들을 나열한 2연은 ‘사람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호명된 사물들과 사람들은 어느 하나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도란거리고 있습니다. 크고 작음, 낡음과 새로움, 탈 수 있는 것과 탈 수 없는 것의 구별도 없고, 남녀노소 신분고하의 차별이나 사람과 짐승의 구분도 없습니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모여 서로 온기를 나누는 오롯한 광경은 전근대적 공동체의 원형이라 할 만합니다.

공동체에 대한 시적 관심은 1970년대에 와서 다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신경림의 『농무』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농촌 공동체가 처한 위기를 실감있는 언어로 보여주었지요. 공동체적 공간인 마을과 장터는 예전의 활기와 웃음을 잃어버렸고, 그 속에서 농민들은 고통과 소외의 피붙이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겨울밤」)이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罷場」) 등의 구절에서 체념과 자조는 특유의 낙천성과 민중적 생명력으로 전화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란 강력한 리더가 이끄는 일사불란한 조직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 어쩔 수 없이 몸을 기대고 부비면서 생겨나는 것임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그 공감의 연대는 단지 살아 있는 사람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 신경림,「묵뫼」

 

목뫼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무덤을 말하는데요. 시골 마을에는 역사의 상처를 간직한 묵뫼 같은 게 하나씩 있기 마련이지요. 전쟁과 살육, 사랑과 배신의 흔적도 다 사라지고 이제 흙 속에 묻혀 하나가 된 존재들, 그들을 품고 있는 묵뫼를 ‘죽음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살아 있을 때 서로 알지 못했던 이들도,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있으니까요. 물론 이 죽음의 공동체는 그들의 능동적 의지나 화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상황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공동체를 묵뫼를 통해서 구현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 주목해 볼 것은, 인간의 죽음이 또다른 생명을 키우고 꽃 피운다는 사실입니다. 묵뫼 위에 피어난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그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등은 인간이 죽음으로 피워낸 ‘생명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삶과 죽음은 울로보로스처럼 맞물려 순환적 질서 속에 놓여 있습니다. 「묵뫼」는 1990년대 후반에 펴낸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 실려 있는데, 이 시에서처럼 자연과 인간사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사회적 공동체가 생명 공동체로 확장된 결과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 시인뿐 아니라 1990년대 시 전반에서 나타났습니다. 1980년대가 노동시, 농민시, 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 변화가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생명 공동체와 감수성의 혁명

 

한국 현대시에서‘생명 공동체’라는 말이 익숙하게 사용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입니다. 그 무렵 문예지들은 앞다투어 생태문학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생태시가 독립된 장르인양 인식되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그런 관심은 유행처럼 지나가버리고, 생명 공동체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성적인 차원에서 주제론적인 접근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시인들의 감수성에 ‘제대로 된 혁명’을 가져오지는 못했지요.

「제대로 된 혁명」은 원래 D.H.로렌스의 시제목인데요. 이 시는 “돈을 쫓는 혁명”이나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대신 “재미를 위한 혁명”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라는 말이 다소 가볍게 들리기도 하지만, 단순한 흥미나 유희적 차원보다는 충일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변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듯한 표현도 ‘우주적 자유’를 위한 모험의 감행을 강조하면서 생겨난 것이겠지요. 동자꽃, 편도나무, 참나무, 장미꽃, 석류, 모과, 마가목 열매, 반딧불이들, 사슴, 뱀, 모기, 물고기, 박쥐, 남생이, 벌새, 코끼리, 캥거루 등 수많은 동식물들이 등장하는 로렌스의 시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희미하게 한번

커다란 민물꼬치가 돌진하고

작은 물고기가 파편처럼 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마음아 넌

한계에 갇혔어

그리고 유일하신 분 하느님도.

물고기들은 내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내 영역에서 벗어난

다른 하느님들, 내 하느님을 능가하는 신들……

―D.H.로렌스,「물고기」부분

 

로렌스는 물고기를 노래하면서도 “물고기들은 내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얼마나 좁은 한계에 갇혀 있는지를 깨닫지요. 그 한계에 대한 고백이 로렌스로 하여금 거대한 생명 공동체의 발견에 이르게 한 힘이었는지 모릅니다. 만물을 “다른 하느님들”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을 의미하지요. 이처럼 시인은 마음의 한계를 무릅쓰고 자기 세계 바깥의 존재를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바깥의 인간은 자기동일성 바깥으로, 의식의 능동적인 힘 바깥으로, 결국 문화의 세계 바깥으로 열려 있는 인간이며, 자아로 하여금 자신과 연결되게 하는 능동적인 힘이 무력화되는 가운데, 자기동일성의 말소와 함께 완전한 수동성 가운데 자연으로 향해 가는 존재로 변한다”는 박준상의 정의처럼, ‘바깥의 경험’은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공유하는 데서 나옵니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거대한 그물의 한 고리에 불과하다는 인식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이라는 생명 공동체의 한 개체를 들여다보면, 그 몸은 또다른 개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도킨스는 생명의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진핵세포의 탄생을 들었습니다. 그 후로 두 개의 진핵세포가 모여 다세포생물이 등장하는 데 다시 20억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세포생물과 달리 다세포생물의 경우 하나의 세포가 병들어 죽어가기 시작하면 나머지 건강한 세포도 죽음을 향해 움직여가야만 합니다. 두 개의 세포가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이상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함께 해야 한다는 협약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과학자는 “다세포생물의 탄생으로 ‘죽음’이 발명되었다”고 하더군요. 250가지가 넘는 다양한 세포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은 ‘세포들의 공동체’인 셈입니다.

장회익 선생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세포와 몸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긴 하지요. 세포들이 모여 몸을 이루는 경우 세포 단위에서는 삶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지만,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경우는 공동체와 개인이 각각 독립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주체로서의 ‘나’는 공동체적 주체인 ‘우리’와 공존하거나 갈등하면서 그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유기체적인 질서가 인간의 공동체에서는 잘 관철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주체의 복합성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윤리적 감각이나 감수성이 늘 깨어 있지 않으면 ‘나’는 이기적 동기나 욕망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게 되니까요. 특히 시인에게 감수성이란 만물을 만나는 통로이자 방식으로서 부단한 성찰과 혁명을 필요로 합니다.

 

시, 부정의 공동체

 

2000년대 이후 한국시에는 공동체 개념의 확장뿐 아니라 서정적 주체를 둘러싼 반성적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래파’(권혁웅)로 명명된 새로운 감수성의 등장은 ‘다른 서정’(이장욱), ‘분열증과 아나키즘’(이광호),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신형철)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서정의 갱신을 요구하고 있지요. 신형철의 평론 「시적인 것들의 분광(分光), 코스모스에서 카오스까지」는 최근 시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기체적 질서에 바탕을 둔 ‘코스모스’의 세계와 부단히 부정의 변증법을 도모하는 ‘카오스’의 세계 사이에서 한국시는 진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젊은 시인들에 한정해 보더라도, 문태준, 손택수, 김선우, 박성우 등은 코스코스의 세계를, 이장욱, 황병승, 김경주, 김행숙, 진은영 등은 카오스의 세계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세대지만 그들은 전통이나 언어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고 공동체를 추구하는 방식도 각기 다릅니다. 전자가 생태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재현적 언어에 충실한 편이라면, 후자는 인공적 언어들이 생산해내는 시적 혼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아우르는 공동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대성의 폭력 앞에서 ‘찢겨진 존재’ 또는 ‘지워진 얼굴’로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자가 분열된 존재를 치유하고 봉합하는 데 초점을 두는 반면, 후자는 분열의 실상을 언어적으로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기 때문에 두 경향이 아주 다른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따라서 전자는 공동체적 지향이 강하고 후자는 개인적 취향이 강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표피적 관찰일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 실재와 언어 등 수많은 대립항 사이에서 그들은 진자처럼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이제 새로운 세대에게 1930년대 백석이나 1970년대 신경림의 시가 지녔던 농경적 상상력이나 공동체의 재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듯 합니다. 시를 통한 공동체의 추구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이 농촌공동체를 노래하는 시들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시가 공동체를 구현하는 방식을 소재나 내용에서만 찾을 게 아니라 시인이 시적 대상이나 언어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서정적 주체에 대한 반성과 낯선 화자들의 출현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이런 현상은 서정시가 단일한 주체가 만들어낸 언어적 구조물이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의 집합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지요. 앞서 언급한 바타이유의 정의처럼, 시는 오늘날 “부정의 공동체,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에 가까워져가고 있습니다. 부정의 공동체 속에서 화자는 명료한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단일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서정적 주체가 오랫동안 누려온 권위를 내려놓고 비운 자리에서 이질적인 목소리들은 만났다 흩어지며 시의 분산적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그 목소리들은 더 이상 견고한 자아를 구성하지 않습니다. 명료한 목표나 지향이 없기 때문에 집단이 개체를, 중심이 주변을 억압하지도 않습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경향의 시들은 난해하거나 산만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저는 그 우연성이 빚어내는 혼돈의 세계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단일한 ‘나’로 존재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반납함으로써 새로운 ‘우리’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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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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